이 기사는 일본의 정보계간지 文藝春秋 SPECIAL 2015年 01月号에 실린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 이시하라 신타로(82)는 지난해 정계를  은퇴하기 전까지 13년간 도쿄도지사 역임, 중의원 9선 의원으로 일본 정치계 거물이었다. 거침없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등 '괴짜'다운 모습을 보였다.


매년 8월 15일, 야스쿠니신사에 참배를 합니다만, 올해(2014년)의 광경은 유난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남녀노소・젊은 세대를 아울러 다양한 일본인이 경내에 가득찬 것을 본 것은 처음일 겁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일본인은 강한 위기감을 가지고 있구나'하고 새삼 느낍니다. 지금의 일본을 바라보고 있자면, 저도 일곱명의 손주가 있습니다만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를 생각했을 때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때, 무엇을 향해서 기도를 하냐면 역시 야스쿠니신사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야스쿠니신사가 국가의 존망・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자들의, 결코 지울 수 없는 생과 사의 기억과 정념의 근거지이기때문입니다. 그 어떤 타인도 그 어떤 외국도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본에게는 극히 내면적인 문제입니다.


2013년 2월, 중의원 의원으로서 국회에 복귀하여 첫 질의를 했을 때 아베 신조군에게 "당신은 오는 8월 15일, 야스쿠니에 참배할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니요. 그 질문에 지금 가볍게 답하면 물의를 일으키기에 말 할 수 없습니다"라는 답변에 저는 "가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가면 반드시 문제가 될테니까. 그 대신 총리대신이니까 국민을 대표해서 천황폐하께 참배를 요청해 주게". 저는 천황이 오늘날 세계에서 단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는 Priest King(祭祀王)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서 예를 찾아보면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종교의 대제사장(大祭司)이었고 동시에 왕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매우 보기드문 존재입니다. 야스쿠니의 영령은 신도(神道)로 모셔지기에 신도의 최고 제사장인 천황께서 부디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처럼 야스쿠니 문제를 왜곡시켜버린 책임자는 나카소네(야스히로 前총리)씨입니다. 이 사람이 총리 재임중에 공식참배를 하고 도중에 태도를 바꿔 그만두는 바람에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용훼(容喙)를 허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참배를 중지한 이유를 "친일파인 후야오방 총서기가 실각할 가능성이 있기때문이다"라고 설명했지만 참배를 안 하니 후야오방은 실각되었고 야스쿠니는 정치문제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황폐하께서 참배를 하신다면 '야스쿠니'는 정치문제가 아닌 일본 문화의 정수라는 것을 국내외에 결정적으로 내비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도지사시절에도 산케이신문의 칼럼을 기고하며 천황의 야스쿠니 참배를 요청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도지사는 1년에 1회 1시간, 천황폐하께 도쿄의 문제에 대해서 진강(進講)합니다만 날짜가 결정되고나서 궁내청으로부터 수차례 "폐하의 앞에서 절대로 야스쿠니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질려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수년전, 역시 8월 15일에 야스쿠니에 참배한 뒤, 차에 타려고 하자 운전수가 "희한하네요"라고 하더군요. 바로 차 앞에 꽂혀있는 깃대에 커다란 잠자리가 앉아있었습니다. 신사에서 자동차로 상당한 속도로 달렸지만 계속 앉아있더군요. 그것이 황거 앞에 오자 휙 날아가버렸습니다. '아, 영령은 황거를 버린건가'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가끔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토론에서 A급전범의 합사가 문제시 됩니다. 도쿄재판에서 A급이라는 등급이 매겨지고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 내실은 잘 알 수 없습니다. "평화에 대한 죄"라는 매우 추상적인 논거조차 의심스러운 재판일 뿐입니다. 재판기록을 보더라도 도죠 히데키의 주임변호인이었던 기요세 이치로와 팔(Radhabinod Pal) 판사의 "A급 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웹 재판장은 명확하게 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급전범이 합사되었다고 해서 야스쿠니가 신사로서 또 소혼사(招魂社)[각주:1]로서 부정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물론 일본의 전쟁지도자에 대한 평가, 이 나라를 패전으로 이끈 책임은 있습니다. 그 검증은 우리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전에도 썼듯이 제 부친은 특이한 사람으로 왜인지 모르겠지만 도쿄재판의 방청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저는 가나가와의 즈시에 살고 있었고 옛 제도인 쇼난중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만 2번 방청을 했습니다. 혼자서 갈 수 없었기에 옆에 있던 대학생 형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첫 날은 비가 와서 게다(下駄)를 신고 갔더니 2층 방청석에 들어가는 도중에 층계참에서 갑자기 헌병이 어깨를 붙잡더니 "시끄러우니까 벗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벗은 게다를 발로 구석으로 치웠습니다. 다시 허겁지겁 게다짝을 줏어서 가슴에 품고 2층까지 맨발로 올라갔습니다. 방청했지만 동시통역이 없어서 피고들도 어떻게 그 논고(論告)를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법정에는 영어만이 들렸고 무언가가 담담히 진행되었습니다. 매우 일방적인 느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판결은 당시 집에 있던 성능이 안 좋은 라디오를 통해 들었습니다. 웹 재판장이 담담히 "히데키 도죠, 아워 인터내셔널코트 풋 유 데스 바이 한깅. 코우키 히로타..."라는 식으로 사형 판결을 읽어내려갔습니다.


내년(2015년)은 전후 70년입니다만 이 시점에 일본인은 도쿄재판사관이라는 주박(呪縛)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야로 역사를 재검토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군위안부에 관한 엉터리 기사를 흘려 온 아사히신문이 이제서야 겨우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기무라 타다카즈 사장은 사죄회견까지 열었는데 좀처럼 사임하지 않습니다. 오랜기간동안 전세계에 데마를 퍼뜨려 온 아사히의 죄는 실로 무겁습니다. 국민을 배반하고 국민을 모욕하고 국가를 모독했습니다.


이제껏 저는 아사히와 두 번 싸웠습니다. 한 번은 편집위원이었던 혼다 가쓰이치와의 논쟁입니다. 난징학살문제에 관해서, 그가 중국측이 발표했던 40만명이라는 숫자를 그대로 인용한 것에 대해 "당시 일본군의 장비로 단기간에 그렇게 죽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론했습니다. 저는 전시중, 종군보도원으로서 난징에 갔던 오야 소이치씨와 이시카와 다쓰조씨에게도 "40만명이나 학살한 현장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런 것은, 자네, 있지도 않았네"라고 답했습니다. 일본군이 게릴라를 잡아서 처형한 현장은 봤을지도 모르지만 대학살이라고 부를만한 사실은 전혀 없었다며 부인했습니다. 여러 사실(史実)과 자료를 찾아보면 혼다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만 그 뒤에도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사히와 두번째 싸움은 운수대신(運輸大臣)을 역임하던 1988년에 일어난 이시가키지마 시라호(白保)지구의 매립문제였습니다. 산호초인 바다를 매립하여 신이시가키공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결정된 것에 대해 저는 크게 반대했습니다. 그 주변은 자주 다이빙을 하러 갔었고 또 환경청장관을 역임했던 경험도 있어서 "저렇게 아름다운 라군을 매립하려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오키나와 개발청장관이었던 가즈야 시게루군이 "한번 결정한 일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하고 얼굵을 붉히며 화를 냈습니다. 이때 아사히신문이 엉뚱한 생트집을 잡았습니다. 오키나와현은 시라호보다 북쪽 지역을 대체지로서 찾기 시작했습니다만, 우연히 그 주변에 제가 별장을 짓기 위해 사 두었던 토지가 있었습니다. 아사히는 그것을 제가 땅값을 올리기위해서 반대했다는 뉘앙스의 기사를 썼습니다. 그 아사히의 카메라맨이 바다에 들어가 스스로 산호를 훼손하고 일본인의 모랄 저하를 우려하는 기사를 쓴 것은 그 이듬해였습니다.


협잡꾼은 어딜가도 있습니다만 한 언론 조직 전체가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것은 망국의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사히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의 왜소한 정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일본과 일본인의 명예를 짓밟고 전세계에 잘못된 인식을 퍼뜨려왔습니다. 종군위안부문제는 바로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상태 속에서 남자들이 성을 갈구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며, 여성을 알선하는 행위도 수없이 있었습니다. 가고시마의 치란기지에서 "특공대의 어머니"라고 경모받은 도리하마 토메씨의 식당 바로 뒤에도 매춘부가 있는 집이 있었고, 어린 소년항공병들이 죽기 전에 처음으로 여성의 몸을 알고 납득한 뒤 죽어갔다는 이야기도 남아있습니다. 극한상태 속에서 그런 것들에 구제받은 인간의 정신이란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일부러 군이 직접 관여하지 않아도 민간업자가 활동했던 겁니다. 아사히가 보도해 왔던, 군이 위압을 이용하여 일반 여성을 납치 연행하여 매춘시키는 행위는 아무리 증거를 찾아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당시 일본의 법규 체계로 보더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中韓, 특히 한국이 위안부 문제를 계속해서 비난하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사실에 대한 민족적 굴욕감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얼마나 관용적인 식민정책을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세이란카이(青嵐會) 시절 종종 박정희 대통령에게 초대받아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박 대통령은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일본인이 찾아와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부모를 벌하겠다"고 해서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학교에 보냈다고 합니다. 그 학교의 교장인 일본인이 "너 공부를 잘하는구나. 앞으로는 조선인이 조선인을 가르치는 시대가 오니까 사범학교에 가라. 학비도 공짜고 공부도 시켜준다."고 추천해 주었기에 자신은 사범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범학교에서 만주의 군관학교로 진학하여 수석이 되어 이치가야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좋은)일을 해 준 통치자는 전세계에 찾아봐도 없죠"라고 박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이시하라씨, 독도는 성가십니다. 그런 바위섬은 아무 의미도 없으니 반드시 나중에 문제가 됩니다. 일본과 한국이 함께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서 없애버립시다"라고. 그런 인연이 있었기에 박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조문을 갔습니다. 딸은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이 아이 앞으로 힘들겠구나"하고 동정했습니다. 지금은 그 딸이 저런(반일) 대통령이니까요. 야스쿠니 문제든 위안부 문제든 中韓이 무슨 소리를 하든 일본이 물러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국경제따위는 일본이 손을 빼면 무너져 버립니다. 중국에게도 "전쟁할테면 해봐"하고 말하면 될 뿐입니다. 얼마전 주간지가 "제일 큰 야망은?"이라고 묻길래, "지나(支那)와 전쟁하여 이기는 것"이라고 답했더니 빈축을 샀습니다.(웃음)


하지만 상대도 바보는 아니니까 일본의 진짜 실력은 알고 있겠죠. 전에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장관을 역임했던 남자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절대 일본은 중국에게 지지 않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즉, 중국이 센카쿠제도를 점령하려고 하면 우선 공중전이 벌어진다. 그들의 주요 공군기지는 센카쿠에서 600km나 떨어져 있습니다. 항공자위대의 나하(那覇)기지에서는 420km로 가깝고 더욱이 세계최고의 태스크포스인 미국 제7함대가 버티고 있습니다. 공중전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제해권을 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에게는 외양해군이 없습니다. 중국같은 거대한 경제국은 수출입이 멈추면 경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외양해군이 없기에 해로 확보가 불가능합니다. 항모를 보유했다고 떵떵거리지만 본래 해상카지노를 할 목적으로 우크라이나로부터 사 온 고철 항공모함입니다. 거기에 순양함 엔진을 두 개 실었지만 속도가 부족해서 비행기는 이착륙도 못합니다. 전세계 해군이 보면 웃음거리중의 웃음거리입니다. 또 잠수함 수는 매우 많지만 해상자위대의 대잠능력은 제7함대보다 높고 소리만으로 모든 잠수함을 식별 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을 전문가는 제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절대 지지 않습니다. 역사문제도 의연하게 반론하면 됩니다.

  1. 국가를 위해 순난(殉難)한 영령을 봉사(奉祀)한 신사(神社) [본문으로]
Posted by 아리스토텔레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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