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3년 7월 산케이신문 인터넷판의 연재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話の肖像画】水野俊平・北海商科大学教授(45)


■ 쓰고 싶었던 조선의 서민생활


한류붐이 지속되고 있는 작금, 한국과 관련된 책들은 "왕이 어쩌니, 공주가 어쩌니, 한국 드라마가 어떻다"라고 얘기하는 것들 뿐입니다. 실제 조선왕조와 조선의 서민생활은 전혀 다릅니다. 서민이 드라마에서처럼 예쁜 옷을 입고 배불리 먹지는 못했습니다.


미즈노 교수는 18세기 조선왕조시대의 서민의 생활을 파헤쳤다. 한국의 서민생활지 <서민들의 조선왕조>(角川学芸出版)을 집필, 출판했다


간만에 쓰고 싶었던 책입니다. 이 책에는 왕이나 왕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서민의 변소를 어떻게 퍼냈다'던가, '술집이 어떤 곳이었다'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한반도에서 문자(한문)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양반(관료, 지배계급)이었습니다. 한글을 쓸 줄 아는 서민도 있었지만 자신의 기록을 남겨야한다는 생각은 없었죠. 그래서 남겨진 문헌이 적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서민에 관한 기록이 단편적으로 실려있었습니다. 양반중에서도 밑바닥 생활에 관심있는 사람이 있었죠. 고구마재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노래와 세시기(歳時記) 그리고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견문록 등 수많은 문헌을 조사했습니다.


한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거의 없습니다. 단, 조선왕조시대의 한국인은 지금처럼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양반은 시간대로 정시에 출근해야 했죠. 하지만 서민은 시간을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밝힐 기름이 필요하고 돈이 들기 마련이니까요. 당시는 야간외출금지령이 있었습니다. 18세기말까지는 금주령도 있었죠. 밤에 나가서 놀 수는 없었죠. 결국 할게 없었습니다. 자는 일 빼고는. 서민은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든 상관없었죠.


지금은 고향인 홋카이도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자란 환경은 한국과 인연이 없었다


부친은 무로란공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저는 뒤늦게 태어난 외동아들이었죠. 아버지도 저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부의 얼굴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홋카이도대학의 대학원에 재학중일때 OB였던 프로 스키선수 미우라 유이치로씨와 함께 스키를 탔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추억은 늘 등산이었죠. 무로란은 산이 많았고 유치원시절부터 겨울산에도 데려가고, 칭얼대면 "혼자 놔두고 간다", "곰이 나오는 곳에 두고 간다"고 했었죠. 곰을 본적은 없지만 정말 두고 가버린적이 있습니다. 춥고 무섭고 괴로웠죠.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히 아동학대죠. (웃음) 그 덕분에 근성을 단련할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생때부터 학급위원장을 할 성격은 아니었고 자리에 있으나 없으나 아무도 모를만큼 평범했습니다. 도립 노보리베쓰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문예부에서 수필을 비롯해서 여러가지를 썼습니다. 상을 받은 기억도 없습니다. 장래희망은 굳이 말하자면 아버지가 교편을 잡고 있었기에 "아무거라도 연구해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빠져든 고교시절


고교생활 중 같은 문예부였던 동급생이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는 아시아의 시대야"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시아가 일어서기위해서는 미즈노, 너밖에 없어"라고 장난치며 말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저에게 불을 지펴주었던 것은 그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고교생 시절, 한국과의 충격적인 만남


당시 고무로 나오키씨의 '한국의 비극'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이 때 NHK교육방송에서 한국/조선어 강좌가 막 시작되었던 참이었죠. 일종의 한국붐이었습니다. 한국어와 한반도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다른게 보이지 않는 성격이었죠. 겨울이 찾아오면 AM라디오에서 한국의 전파가 자주 잡혔습니다. 사회교육방송이라는 해외전용방송을 자주 들었죠. 대부분이 이산가족찾기, 공산당 욕하기, 반공 라디오드라마, 그리고 노래, 한국의 트로트였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빠져들던 가운데, 점점 "대학에 가서도 '한국'을 전공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강해졌습니다. 당시 한국/조선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는 많지 않아서 나라의 텐리대학 외국어학부 조선학과에 들어갔습니다. 홋카이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 관서지방은 다른 문화를 가진 곳이었죠. 말하자면 '국내유학'이었습니다. 날씨를 비롯해서 먹거리, 마인드 등 많은 것이 달랐죠. 중고생시절 '만화붐'이 있었지만 관서지방 사투리를 처음 들었을때는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또, 관서지방 특유의 찌는 여름 더위. 홋카이도에는 선풍기가 없었지만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선풍기를 샀습니다. 하숙집 월세는 1만2천엔. 지어진지 100년이 넘었는데 농가의 헛간을 개조한듯한 건물이었습니다. 부엌, 화장실, 세탁기는 공용이었고 욕실은 없었죠. 그곳에서 4년동안 지냈습니다. '언젠가는 한국에 유학하게 되겠지'라는 생각에 유학비용을 모으기 위해서 매일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편의점 한 곳에서 4년동안 일했죠.


나라는 학문에 몰두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선배와 친구가 있었죠. 하지만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죠. 주변에는 문헌과 자료가 많이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버블시대의 정점이었습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취업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분위기가 만연했습니다. 그때 읽었던 책이 구로다 가쓰히로의 '서울발, 이것이 한국이다'와 세키가와 나쓰오씨의 '서울의 연습문제', '해협을 건넌 홈런'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해협을 건너다


대학 1학년이었던 1986년, 훗날 NHK의 한국어강좌 강사를 맡게 된 마쓰오 이사무 선생께서 "한국연수를 모집하고 있다"고 추천해주셔서 처음으로 해외인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인솔은 마쓰오 선생께서 하셨고 열 몇 명의 인원으로 자주연수같은 여행이었습니다. 부산에 입국하여 경주와 옛 백제였던 충청남도의 부여, 공주의 무녕왕능 등을 돌아보았습니다. 서울에서는 홈스테이와 고려대학교에서 연수도 경험했습니다. 수학여행기분이었죠.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생을 데리고 선생님도 고생이 많았을 겁니다. 은사님은 정말 인격자셨죠.


 하키를 인연으로 결혼까지


학생시절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현지에서 친구도 생기고 초대받아 묵기도 했습니다. 한국 전국을 돌기도 했죠.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체험


대학 2학년때였습니다. 하키부 담당 선생님께서 느닷없이 "통역을 맡아주지 않겠나"라고 하더군요. 당시 텐리대학은 한국의 하키선수들이 자주 찾아왔지만 언어문제로 트러블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학과에서 통역을 구하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한 경험도 있어서 하키계에서는 권위가 있는 분이셨죠. 강호 경희대학교 여자하키부의 통역을 맡아 감독님 눈에도 들었었죠. 하지만 너무 강했죠. 차원이 다른 세계를 엿 본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여자하키는 정말 강했습니다. 이게 계기였습니다. 하키 티켓을 구해서 서울올림픽도 보러갔었죠.


대학을 졸업하고 본고장, 한국의 대학원에서 학문에 정진. 계기에 또 전환기가


대학졸업을 앞두고 한국의 지인이 김대중 전대통령의 정치기반인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 대학원을 소개해주었습니다. 특별선고로 입학하게 되어 1990년부터 국어국문학과에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쯤, 우연히도 근처에 텐리대학을 방문했었던 여자하키선수의 친정집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본에서 제가 통역을 담당했던 한국 청소년 대표선수였습니다. 서울에 가면 우연히 그녀도 서울에 있었죠. 그게 인연이었을까요. 지금 제 아내입니다. 학생시절 일본에서 만났었죠. 동갑인 아내는 결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지는 않았고, 오히려 현대 한국의 성장과정을 그대로 말해주는듯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하키를 시작하여 경희대학에 체육추천으로 입학한 뒤 청소년대표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장인장모님께 불려가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물어보시길래 그때 결정했습니다. 95년에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완전히 체육계였습니다. 일본에 와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죠. 앞만 보고 나아가는 모습에서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93년에 석사학위를 따고 95년에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 해에 결혼하고 바로 비상근강사로 전남대학에서 일했죠.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면목없지만 학위를 땄을 때 귀국했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초 목적은 한국어를 배우고 일본에서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일어일문학과를 가르쳤죠. 방향성이 달랐습니다.


광주에서 지내면서 또 한번 전환기가 찾아왔습니다. 98년에 KBS 지역방송의 판소리 방송에 초대되어 출연했을 때, 프로듀서가 나중에 서울로 전근하여 "전라도 사투리를 하는 재밌는 일본인이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KBS 버라이어티방송에 고정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정말 바빴죠. 전화벨이 끊이지 않는 날들이었습니다.


 인기절정에서 갑작스런 비난세례


우연한 TV출연이 '미즈노 교수'를 가장 유명한 재한 일본인으로 만들다


당시 한국은 전라도를 정치기반로 하는 김대중 정권이었습니다. 그 전라도 사투리를 할 줄 아는 '희한한 일본인학자'의 인기는 TV출연으로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수도 서울뿐만 아니라 한국 방방곡곡 어디를 가도 "미즈노 교수! 미즈노 교수!"라고 불리며 악수를 청해오거나 사인을 요청해 왔죠. 광고에도 출연했습니다. 지금도 삿포로시내에서 운전할때면 "미즈노같은 사람이 있어"라는 한국어가 들려오곤합니다.


생활은 갑자기 변했습니다. 주 2회 비행기로 서울에 가서 TV방송 출연. 돌아오는 길 저녁은 장거리 버스. 이렇게 4~5년이 계속되었죠. 인기절정일 때, 셋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한국태생인 장남은 일본국적이지만 일본어를 할 줄 몰라서 아버지로서 고민이었죠. 그래서 서울에 있는 일본인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지만 "일본어를 할 줄 모르면 안된다"라며 거절당했습니다. 심지어 학교 근처로 거처를 옮겨야 했죠. 하지만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가서 집까지 빌린 상황이어서 저는 홀로 생활했습니다. 무엇이든 망설임없이 바로 실행하는 결단력인지 행동력인지 아무튼 대단한 여자였죠. 장남은 우선 일본인학교 유치원에 입학시켰습니다. 새로 집을 빌리기 위해서 5천만원의 빚이 생겼습니다. TV출연료는 그걸로 전부 사라졌죠.


저는 매주, 광주와 서울을 오갔습니다.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은 대개 취해있었죠. 방송녹화가 끝나면 스탭, 출연자와 회식을 했죠. 음주사회,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남자는 술을 마시는 편이 좋았습니다. 더구나 즐겁게 마시며 노는게 좋죠. 노래가 더해지면 더 좋죠. 한국 풍토상 하는 수 없었죠. 일본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한국에서는 당연했습니다. 집에 돌아가기전까지 술잔치였죠. 집이나 술값은 생각도 하지 않았죠.


돌아가신 아버지의 걱정. 그리고 다시 전기(転機)가 찾아오다


당시 삿포로에 있던 아버지는 이웃나라에서 인기있던 저를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개최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만 단골 술집에서 저를 언급하면서 "언젠가는 실패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훗날 알게 되었을 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인기가 치솟던 2001년에 박사학위를 땄지만 TV출연을 겸하느라 매우 바빴죠. 지도교수는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국어를 가르쳐라"라고 했죠.


인기절정이던 일본인 '미즈노 교수'는 2005년 어느날, 돌연 비난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출판된지 몇년 지났던 저서 <한국인의 일본위사>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인터넷언론의 기사가 발단이었습니다. 한국인의 일본관과 역사인식에 관해서 저의 '독설 책'은 이전부터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인가 싶었죠. 당시 일본에서의 한류붐으로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해 우월감이 싹트기 시작했고, 동시에 독도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반일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전라도를 기반으로 하는 김대중정권도 끝났죠. 그게 전환기였습니다.


 필연으로서 일어난 수많은 경험


인기가 사라지는건 정말 한순간이었습니다. 비난도 언론을 통해서 순식간에 확산되었습니다.


"미즈노는 TV에서 즐겁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뒤에서는 한국의 악담을 쓰고 있다." 한국언론의 비난은 이랬습니다


한번 불이 붙은 비난은 엄청났습니다. 정신적으로 힘들고 살아야 할 이유조차 잃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건 생활고였습니다. TV출연이 한번에 사라졌죠. 아이 셋을 안고 서울에서 살기 위해서는 당시 24~25만엔은 필요했습니다. 대학강사만으로는 그렇게 벌 수 없었습니다. 일본의 대학도 생각해보았지만 실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본에 돌아간다고 해도 바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게 힘들었죠.


젊었기에 인기에 정신을 잃었었죠.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최종목적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이었죠. "언젠가 일본으로 돌아가 교편을 잡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대로 한국에서 예능활동을 계속했더라면 한국에 귀화해도 좋았을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인기는 마약이었습니다. 겨우 정신이 돌아온듯한 느낌이었죠. 저를 구해준 것은 아내가 아무런 내색도 안하고 낙천적인 생각으로 지켜봐주었기 때문입니다. "긴 인생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라면서.


고향에서의 재출발.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부인과 자식에게는 이국땅


아내는 외국에 있다는 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즐겁고 활기차게 지냈습니다. 아이들은 고2, 중2, 중1로 아들만 셋. 장남은 아직도 일본어보다 한국어를 잘합니다. 조금 분하지만 저보다도 발음이 좋습니다. 차남은 회화는 할 줄 알지만 읽고 쓸 줄은 모릅니다. 막내녀석은 한국어를 익히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도 빨랐죠. 유치원때 한국을 떠나 일본에 왔으니까요. 한국어는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지금도 홋카이도 사투리를 합니다.


한국에는 지금도 "숨은 미즈노 팬"이 많은듯 하지만


"다시 TV에 나와달라"고 해도 "다른 사람으로 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학자는 논문을 쓰는 것이 본분이니까요. 한국에서 도움을 주셨던 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TV에 출연했던 것이 발목을 잡게되었습니다. 당초 목적인 공부하는데에도 지장이 있었으니까요. 그곳에서 더 공부했어야 했죠. 10년은 늦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 겨우 궤도를 수정해서 시작했습니다.


바쁘지만 지금이 행복합니다.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고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한국에서는 여러 경험을 했지만 "불필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부, 필요한 일, 필연으로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야겠죠. 그걸로 된거죠."

Posted by 아리스토텔레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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