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일본의 월간지 中央公論 2015년 09월호에 실린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중국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하고, 아베 신조 내각은 헌법개정까지는 나서지 않고, 센카쿠 열도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 동아시아의 정치적긴장은 위기적 단계에 와 있다. 그런 가운데 일본정부가 전후 70년을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관심이 쏠려있다. "아베 총리는 1995년 무라야마담화를 계승하며 전쟁책임에 대해 사죄하고 이웃국가와의 화해를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동아시아국가와의 골이 더 깊어질 것인가?" 그러나 유럽을 보면, 전쟁을 둘러싼 소위 '역사인식문제'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따름이다. 유럽도 '전후 70주년'을 기념했다. 올해는 그리스와 러시아를 둘러싼 위기로, 유럽에는 예년보다 어려운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舊추축국이었던 독일이 과거를 재해석하고 유럽 전역에 논쟁을 일으킬 우려따위는 전혀 없었다. 유럽에서 그 전쟁을 떠올릴 때, 그 핵심에는 1945년 이후 전쟁책임을 받아들였던 독일을 향한 신뢰가 있다. 유럽 전역의 지도자와 국민은 당시 전쟁터와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추도하고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바로 여기에 종전을 기념하는 가장 큰 의미가 있다. 평화와 협조를 위해서 올해 기념사업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 2세의 독일 공식방문이었다. 여왕은 이 자리에서, 베를린에서 유럽의 단결이 얼만큼 중요한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연설과 달리 조용히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안네 프랑크가 수용되었던 장소로 유명)를 방문한 것이다.


1984년 9월 22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제1차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사상자를 낸 베르됭에서 전몰자를 추도하며 서로의 손을 잡고 있다.


또 유럽에서 보자면, 일본이 자국의 역사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는 것도 이상할 따름이다. 유럽에서 그 전쟁과 일본을 둘러싼 사실은 단순명쾌하다. 즉, "일본이 중국과 서방에 침략전쟁을 하는 바람에, 그 사이에 일본은 남경에서 학살과 정책적인 포로학대를 거듭했고, 이 점에서 일본은 독일과 전혀 다를게 없다. 그렇기에 훌륭한 민주주의국가인 일본은 독일의 선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필연이며 일본은 도덕적책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스스로의 과거를 부정하고 좋게 말하면 모호한, 부분적인 사죄를 할 뿐 나쁘게 말하면 전쟁책임을 부정하고 전쟁으로의 결단을 긍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지난 3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은 과거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유럽의 시점에 하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유럽에서는 "일본은 국가 또는 국민수준에서 볼 때 역사의 면탈행위를 항상 부정해왔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다. 일본이 최근 과거에 대한 사죄를 수차례 거듭하여 밝히고 현재 내각의 입장에 일본국민전원이 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쟁범죄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업적이 일본인학자의 손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유럽의 시점이 너무나도 자화자찬적인 것도 하나의 문제다. 유럽에서는 "미국인이 2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일본인은 '전쟁범죄다'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유럽이 과거를 어떻게 해석해왔는지도 되물어봐야 한다. 독일이 항상 전쟁을 둘러싼 책임을 완전히 받아들여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도저히 말하기 힘들다. 본래 2세기에 걸친 유럽의 제국주의의 역사라는 보다 큰 시점에서 보자면, 유럽이 그 전쟁을 둘러싸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이상할 뿐이다.


유럽의 시점에는 일본의 이웃국가, 특히 중국이 역사를 정치적인 무기로 이용하는 것에 자각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1989년 천안문사건 이후 중국정부는 애국주의자로서의 측면을 강조하고 지배를 영속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은 호전적태도와 전쟁의 희생자정신을 애국교육에 심어넣고 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는 前述한 문제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독일이 안고 있던 역사인식을 둘러싼 과제는 이웃국가의 '관용적인 태도'로 인해서 쉬워졌다."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독일의 옛 적(특히 프랑스)이 독일과 새로운 유럽을 건설하려고 노력한 것은 독일이 과거를 반성하는 계기를 주었다"라는 인식이다. 커다란 화제가 되었던 메르켈 총리의 발언이지만 사실은 "어째서 유럽과 아시아의 경험이 이렇게 다른가?"를 둘러싼 의문점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내기 위해서는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를 냉전기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두 개의 대전은 유럽에 괴멸적인 피해를 초래하고 서양문명의 발상지를 소멸시킬 우려가 있었다. 이 전쟁은 두 번 모두 독일에 의해 시작되었다. 대전의 비극을 두 번이나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의 장 모네와 로베르 슈만, 그리고 벨기에의 폴 앙리 스파크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유럽경제공동체(EEC)'와 같은 초국가기구을 설립하여 독일을 포함한 지역적인 협력을 추진함으로서 '평화'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유럽통합의 움직임은 두 번에 걸친 전쟁이라는 과거의 극복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냉전시대의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특히 전쟁 직후 연합군(영・프・독)에 의한 독일점령전책은 소련의 팽창정책에 서유럽이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만약 점령하의 독일이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에 대한 증오를 품으며 빈곤에 허덕였다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독일내에서 확대될 위험성이 있었기때문이다.


▲ 1970년 12월, 바르샤바 유태인 봉기 기념탑을 방문하여 참회하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소련의 위협은 서유럽에서 통합된 '독일연방공화국(서독)'건국의 계기가 되었다. 소련의 위협이란 서방에게 군사적인 것이었으며 서독이 소련과 서방의 전투에서 최전선이 될 수 있기에 서독의 재군비는 비교적 조기에 실현되었다. 1955년에는 독일 연방군(Bundeswehr), 즉 서독군이 설립되고 이와 함께 서독은 NATO의 일원이 되었다. 이로써 서독은 이웃 유럽국가로부터 안전보장면에서도 경제면에서도 그 존재를 보장받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민주주의국가로서 존립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 초대 총리인 콘라드 아데나워의 정치적 리더십으로 국가재건이 시작되고 그는 "서독이 서방의 일원으로 통합됨으로서 나치적인 경향을 배제하는 유일한 수단이다."라고 생각했다. '독일 기독교민주동맹(CDU)'의 아데나워는 보수적인 내셔널리스트였다. "1933~1945년의 독일은 나치스에 의해 점령당했고, 이 나치의 전쟁범죄만으로 독일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1951년에 이스라엘과의 배상 협상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스정권에 대한 협력자에게도 동정적이었고 이것이 독일 보수파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장려하고 서유럽과의 통합을 꾀했던 아데나워식 사고는 1960년대에 들어서자 역사인식이 변화하는 징조가 보이게 된다. 서독에서는 非마르크스주의좌파인 사회민주주의가 존재하고 그 정당인 '독일사회민주당(SPD)'이 전쟁중의 역사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이것이 역사인식 전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69년에 SPD가 정권을 잡자 적극적으로 역사(과거)와 마주하려는 태도가 가속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에 폴란드를 방문하여 바르샤바봉기로 희생된 유대인들의 기념비 앞에서 깊은 자책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독일정부와 사회가 전후 20년이 넘어서 전쟁의 죄의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전후규범에 커다란 변용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부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전반의 격렬한 학생운동이 그 배경에 있다"라는 설도 있다. 戰中의 전후처리에 대해서 제대로 논의해 오지 않았던 것이 폭력적인 학생운동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여러 중요한 점에서 볼 때, 일본의 전후의 경험은 戰時期 동맹국이었던 추축국의 그것과는 달랐다. 서독과 이탈리아는 NATO나 EEC같은 유럽지역기구의 일원이 되었다. 일본도 1954년에는 영연방을 주축으로 결성된 '콜롬보 플랜'에 참가했지만 일본의 냉전기 대외관계는 미국과의 양국간 관계가 중심이었다. 한편 미국은 서태평양에서 일본의 전략적지위를 고려해 볼 때, 전후 보수파가 일본의 정권을 장악하는 것에 만족했고 일찍이 전범용의가 있었던 기시 노부스케의 총리 취임도 환영했다. 즉, 일본은 유럽 같은 다국간 지역기구나 그 창설에 관여한 적이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도쿄재판에서 천황을 소추하지 않기로 한 미국은 독일의 아데나워가 창조한 논리의 '일본판'을 만드는 것에도 조력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이라는 국가는 급진파에게 '하이재크'되었기에 국민은 무죄다"라는 논리다. 이렇게 일본에서도 1950년대 독일과 이탈리아에 존재했던 사고의 틀짜기와 같은 것이 탄생하게 된다. 다시말해서 전쟁에 돌입한 것은 잘못이었고, 두번 다시 있어서는 안되지만, 전쟁범죄에 관해서 일본이 어느 정도의 죄를 짊어지어야 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고려되지 않았다.


▲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1896~1987). 종전후 A급 전범 용의로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나 1948년 12월 24일 기소되지 않고 풀려난다. 일본의 제56, 57대 총리를 역임하며 1960년 미일안보조약 비준을 강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럽의 추축국과 일본의 차이점은, 그 후 일본이 '반신(半身)의 회오(悔悟)'라고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국내정치에 있었다. 독일과 대조되는 것은 일본의 유력한 야당이었던 '일본사회당'이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극좌적인 입장을 고집했던 것이다. 자민당이라는 보수세력과, 재계와, 미국의 일치된 반대에 직면한 상황에서 사회당이 정권을 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전후 일본의 보수파에 의한 과거 해석은 정치적인 도전을 받는 일이 없었고 재구축조차 되지 않았다. 서독의 SPD와 같은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을 지지해주는 이웃국가로부터의 자극의 결여다. 중국은 공산당에 지배되어있었기에 독일에 대해서 프랑스와 닮은 역할을 짊어질 수 있는 쪽은 한국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전략적 위협에 직면해있었고 각각 미국과 양국간 안전보장협정을 통하여 냉전시대 미국진영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에 대해 프랑스와 같은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한국의 국시는 일본에 반대하는 것이며 화해는 정치적인 문제가 될 우려가 있었다. 심지어 전후 한반도가 분단되어 남북 쌍방이 그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던 것도 크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에 대한 적의가 쌍방에 침투해있었기때문이다. 예를들어 한국이 일본과 화해하면 북한측에게 프로파간다의 구실을 주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일본과 한국이 간신히 국교정상화를 이뤄낸 것은 1965년이다. 미국이 뒤에서 열심히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 후 한일관계에서는 정상회담 때마다 일본이 사죄를 거듭했지만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 종군위안부문제와 야스쿠니참배문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측의 성의가 의심된다"라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지만 "사죄의 효과가 그 성격의 본질에 따라서 훼손되었다"라는 것도 중요했다. 즉, 그러한 사죄는 공적인 장소에서 이뤄졌지만 일방통행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일관계에서는 "일본이 사죄한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할뿐, 독일-프랑스관계처럼 쌍방향적인 화해를 하는 것은 강조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에 관해서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어떤 이유든간에 독일-프랑스와 동아시아의 차이임에는 분명하다. 1972년에 국교를 정상화한 중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도 내셔널리즘은 일본을 적으로 간주함으로서 성립되었다. '천안문사건'이후 중국 공산당은 권력장악을 위해서 정통성의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중국 공산당이 일본과 타협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였지만, 중국공산당은 교육을 통해서 중국의 국가적인 위협을 거세게 주장하는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더구나 서방에 있는 조선・중국계 지식인(디아스포라)들의 발언은 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서방이 경험한 홀로코스트의 논의에 이끌렸던 그들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주장하는 한가지 방법으로서 때로는 거칠게 일본비판에 참전했다. 이것은 일본의 우파를 보다 방어적으로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도 화해는 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 왼쪽부터 시진핑 중국국가주석,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에서 역사는 통합의 원천이었던 것에 반해, 동아시아에서는 역사가 분열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리스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 독일은 오늘날 유럽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지만, 일본은 동사이아국가로부터 떨어져 지도적 입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문제가 계속되는 한 동아시아의 지역통합은 불가능 할 것이다. 아베내각이 역사문제 처리를 잘못 할 경우, 이 8월에 사태는 좋아지기는 커녕 악화될 것이다. 과거의 사죄가 논쟁을 진정시키는데 실패했듯이 다른 길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아데나워와 드골, 바르샤바에서 브란트, 베르됭에서 콜과 미테랑과 같은 유럽의 사례는 공적인 화해를 위해서 보다 넓고 힘 있는 상징적인 행위가 동아시아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한・중일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이러한 행위는 단기적으로는 반대에 직면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3개국 지도자들이 이러한 리더십을 보일 가능성은 유감스럽게도 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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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리스토텔레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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