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일본의 국제정보지 Newsweek 일본판 2015년 7월 28일자에 실린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 한국의 윤병세 외교부 장관(왼쪽)이 6월 21일 도쿄의 일본 외무성 이이쿠라 공관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AP통신)


계속해서 우여곡절을 겪은 세계유산등록사태는 시작에 불과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진흙탕 외교투쟁은 제2의 외교문제로?


7월 초,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의 세계유산 등록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유네스코 일본대표부 사토 쿠니 대사는 순간 활짝 띤 미소를 보였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축하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산 등록을 위해 노력해 온 지자체 관계자 대부분은 本誌 취재에 함구령이라도 내린듯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무거운 입을 연 어느 지자체 담당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본의는 아니다. 유산의 본질이 아닌 다른 부분에만 주목하고 있다" "다른 부분"이란 유산을 둘러싼 한일 외교 배틀이다. 식민지 시절에 이번 산업혁명유산에서 일했던 한반도 사람들이 '강제노동'이었는지 아니면 자국민으로서의 '징용'이었는가가 쟁점이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5월. 일본이 등록을 추진하던 산업혁명유산 23곳 시설 중 7곳에서 戰時中 약 58,000명의 한반도 출신자를 징용하여 희생자가 나왔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가 신청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6월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화해했지만 7월 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 측은 "한반도 출신자가 '강제노동(forced labor)'당했다는 것을 결의 내용에 명시해야 한다"라는 의견 진술을 준비했다. "자국민으로서 징용공이었으며 강제징용이 아니었다"라는 일본측 조정이 난항을 겪었다. 결국 등록 결정 후, 일본 측은 한반도 출신자 중 일부가 '노동을 강요받았다(forced to work)'라는 표현으로 성명을 내고 한반도 출신자의 피해를 설명하는 정보 센터 설치를 검토하는 선에서 양보하여 매듭지었다. 사사에 켄이치로 주미대사는 "일본이 유산 설명에 덧붙이기로 한 '노동을 강요받았다(forced to work)'라는 한 문장의 해석 문제는 지엽말절[각주:1]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제2의 위안부문제'로 발전할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다.


위안부문제는 1991년말 당시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이 "정부가 관여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말한 직후 정부관여를 나타내는 자료가 발견되어 패닉에 빠졌던 미야자와 키이치 총리가 방한 당시 거듭하여 사죄했다. 결국 '강제성'이 입증되지 않은 채 '사죄와 반성'을 담은 관방장관담화를 발표했다. 끝없는 위안부문제의 출발점이었다. 한국정부는 지금도 일본에게 사죄와 법적책임을 추궁하고 있다(배상에 관하여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입장). 전시중 징용공에 대한 배상을 둘러싸고 양국 모두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맺어진 한일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2012년, 한국의 대법원이 "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을 제시함으로서 미쓰비시중공 등 일본기업을 상대로 소송이 이어졌다. 고등법원에서는 이미 배상금 지불명령판결이 내려졌다.[각주:2] 일본정부에게 前징용공의 배상문제는 '판도라의 상자'다. 수십만명으로 알려진 前징용공의 숫자는 위안부와 비교가 안될만큼 많고 청구되는 배상금액도 막대하다. 지불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한국의 사법당국은 일본기업의 자산동결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일본경제에 영향이 불가피하다. 한편, "이런 상황에 빠진 원인은 일본정부에게도 있다"라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번 산업혁명유산은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로 기간을 나눠서 신청했다. 1910년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해다. 세계유산등록을 목표로 했던 산업유산국제회의에서 전문가위원을 지냈던 규슈대학 명예교수인 아리마 마나부씨에 의하면,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제 집합주택이 건축되는 등 '군함섬'으로 알려진 나가사키의 하시마탄갱이 유산으로서 본질적인 가치가 생긴 것은 1910년보다 나중의 일이다. 이외에도 이번 신청에는 1910년 이후에 가동한 유산도 포함되어 있어 그런 유산은 한국에서 볼 때 '강제노동'의 대상이 된다. "전문가위원회에서는 1910년으로 구분하는 말은 없었다. '한일병합이전의 유산이다'라고 강조하고 싶었겠지만 한국에 반론의 여지를 주었다"고 아리마씨는 말한다.


일본정부의 주장으로는, 1910년은 어디까지나 '영일박람회'가 개최되고 일본의 산업발전이 한 단계를 끝마친 해다. 단, 일본정부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한국은 對日외교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의 윤병세 장관은 일본이 표명한 정보센터설치에 관하여 2017년까지 보고할 것과 2018년까지 실시할 것을 요구해왔다. 더구나 한국의 노림수는 징용공과는 상관없는 '마쓰시타주쿠'로 향하고 있다. 마쓰시타주쿠를 주재했던 요시다 쇼인이 일찍이 한반도의 속국화를 주장했기때문이다. 다케시마(한국명 독도), 역사교과서 그리고 위안부로 이어지는 새로운 외교문제가 생겨났다고 한다면 일본정부가 이번 세계유산등록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1. 枝葉末節 : 중요하지 않은 사항 [본문으로]
  2. <a h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682702">〔연합뉴스〕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할머니 손해배상 항소심도 승소(2보)</a>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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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리스토텔레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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