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일본의 주간지 週刊文春 2014年 10/16号에 실린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 좌측부터 구수정 선생, 하미 할머니, 베트남 통역인 시내 (사진 : 건치신문)


한국군은 베트남전쟁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사실을 면밀하게 조사하여 15년전에 고발한 한국인 여성이 있다. 하지만 그 후 그녀의 친정집 앞에는 염산이 든 드럼통이 놓여지고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그녀가 일본언론에 처음으로 밝힌 한국의 '어두운 그림자'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세대나 지역을 불문하고 인권과 인도주의에 명백히 반하는 행위입니다." 9월 24일, UN총회에서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했다. 일본군의 종군위안부 문제를 염두한 것으로 보이는 이 발언. 박 정권은 출범 이래 일관하여 위안부문제를 '보편적인 인권문제'라며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한 한국인은, 이 발언은 너무나도 일방적이라 '어떤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과연 일본인만 나쁜 걸까요. 한국인도 과거에 베트남 전쟁에서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한국사회는 아직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번 취재에 실명으로 이렇게 고발한 것은 한국인 여성 저널리스트이자 평화활동가인 구수정씨(48). 구씨는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민간인학살이라는 '암부(暗部)'를 처음으로 폭로했던 저널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지금도 베트남에 머물며 베트남전쟁의 한국군 '범죄'에 관하여 면밀한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本誌 기자는 구씨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기 위해 호치민시로 날아갔다. 그녀가 일본 언론의 이처럼 긴 인터뷰에 응하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취재는 3시간에 달했다. 이미 17여년을 쏟아 부은 조사활동의 단서에 대해서 구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베트남전쟁의 학살 문제를 알게 된 계기는 1997년에 입수한 한 통의 자료였습니다. 당시 저는 호치민대학에 유학중이었고 석사과정을 마치고 논문 테마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자료란 베트남의 정치국・전쟁조사위원회가 정리한 '남베트남에서 남조선(한국)군의 죄'라는 중간보고서입니다. 보고서에는 한국군이 5천명 남짓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내용이 너무나 처참해서 당초에는 도저히 믿지 못했습니다. 이 자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처음 몇년간은 고민했습니다. 결국 저는 자료에 아직 쓰여있지 않은 사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행동에 나섰습니다. 우선 대량의 고려인삼차를 차에 실었습니다. 직접 찾기 위해서 차를 나눠주면서 학살 피해를 입었다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것은 박근혜의 부친인 박정희 정권시절이다. 내전에 개입하던 미국이 북폭(北爆)을 개시하며 베트남전쟁이 본격화되었다. 1964년부터 지원부대를 보내던 한국도 파병을 결의, 남베트남정부로부터 요청이라는 명목으로 1965년에 집단자위권을 행사하여 박 대통령은 총 32만명이나 되는 병사를 전쟁터에 투입시켰다. 파병 부대는 '맹호대', '청룡대', '백마대'로 3개 부대다.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졌던 것은 주로 후이엔, 빈딘, 꽝아이, 꽝남 등 4곳으로 모두 한국군 주둔지 주변이다. 한국군은 베트남사람으로부터 '다이한(대한)', '박정희의 병사들'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생존자들 말로는, 마치 토끼사냥을 하듯이 마을 주민들을 쫓아가며 수류탄을 던지거나, 이제 막 태어난 갓난 아이가 40명 이상 살해당하는 등 참혹한 이야기가 차례로 나왔습니다. 수류탄 외에도 기관총으로 죽이거나, 동굴로 도망친 주민을 최루가스로 살포한 뒤 총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왜 학살이 벌어졌냐면 한국군이 기지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지 주변에 마을이 있으면 적이 잠복하는 은거지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을 전략촌(사실상의 수용소)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대부분 마을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1mm도 여기서 떠날 수 없어요'라며 슬로건을 내걸거나 나무를 붙잡고 매달리며 전략촌 가는 것을 거부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국군이 선택한 방법이 학살이었습니다. 학살의 85%는 1966년에 집중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기지건설을 위해서였습니다"


1968년에도 학살이 있었지만 이 해는 베트공의 반격으로 보복성 학살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민간인학살을 실행한 것은 주로 맹호부대였습니다. 그 수법은 많은 주민을 한 곳에 집합시켜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죽이는 것이었지만 때로는 칼로 참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자이(Go Day)에서는 300명이상의 주민이 한곳에 모여져 1시간여만에 한사람도 남김없이 살해당했습니다. 또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을 강간・윤간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대부분은 살해당합니다. 그래서 강간피해자의 직접증언은 극히 드뭅니다. 빈딘에는 학살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학살과 강간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이 생생히 되살아납니다. 한국군에 대한 베트남 사람의 원념이 떠올려지는 벽화입니다."


한국군의 소행은 박근혜의 "인권과 인도주의에 반하는 행위"라는 간단한 표현으로는 형용할 수 없을만큼 무도한 것이었다. "저에게 벽화보다 더 충격이 컸던 것은 위령비와 비석이었습니다. 위령비 뒤에는 사망한 사람의 이름과 함께 성별과 생년이 새겨져 있는데 한눈에 'THI'라는 표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이라는 뜻입니다. 또 1965~1968년이라는 생년도 눈에 띕니다. 이것은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젖먹이와 어린이가 살해당했음을 의미합니다. 학살당한 사람 중 20%가 어린이, 60~70%는 여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충젹적인 사실입니다." 전시, 마을에 남겨진 것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뿐이었다. 한국군은 그런 마을에 쳐들어가 학살을 거듭했다. 구씨의 조사에 따르면 학살은 알려진 것만으로도 90여건, 피해자는 9천명 이상이라고 한다. "제가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 1999년은 베트남전쟁으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어느 마을을 방문해도 이 30년간, 한번도 한국인에게 만난 적이 없다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어느 마을에서도 바로 100명 정도의 주민이 모여서 'kai, kai'라며 손을 듭니다. 'kai'란 '진술하고 싶다'라는 의미입니다. 수십년이나 봉인된 역사를 그들은 한국인인 나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조사 도중, 신변의 위험을 느낀 적도 있다고 한다. "빈딘성 따이빈에서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 할머니는 한국군의 총으로 폭행당해 머리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천천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할머니를 돌보고 있다는 남성이 나타났습니다. '만약 내 자식이 살아있었다면 당신 정도의 나이다.' 남성은 그렇게 말하더니 흥분해서 저를 때리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1966년 1월에 태어났습니다. 바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학살을 반복하던 시기와 겹칩니다. 그 때는 제가 맞고 있는 것을 본 로우 할아버지라는 분이 달려와 저를 감싸안으며 막아주었습니다. 조사중에 베트남 사람에게 맞은 것은 이때 한 번 뿐입니다. 저를 때리기 위해 달려든 남성도 30분 정도 지나자 냉정해 지며 저에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딸이 학살당했을 때의 기억을 덤덤히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는 딸이 셋 있었고, 막내는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한국군의 수류탄으로 살해당했습니다. 작은 몸뚱이는 이리저리 흩어지고 팔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남성은 울면서 시체를 모았습니다.... 그 후, 저를 감싸준 로우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다 함께 술잔을 주고 받았습니다. '꽁다'라는 토종술입니다. 남성도 울었습니다. 저도 울었습니다. 로우 할아버지도 울었습니다. 그것을 본 주민도 다 같이 울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구씨는 45일간에 걸친 조사를 마치고 한가지 결심을 한다.

"이것을 한국 언론에 공표하자"


1999년 5월, 구씨는 한겨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 <한겨레21>에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벌인 한국군의 범죄를 백일하에 알린 것이다. 그녀의 고발기사를 계기로 이듬해인 2000년 4월 <한겨레21>에는 학살을 저질렀다는 前한국군인의 증언이 실렸다. 게다가 같은 시기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가 베트남전쟁의 한국군의 학살 문제를 다루었다. 구씨의 조사도 함께 소개되었다.


반응은 격렬했다. 2000년 6월, 한겨레신문사에 베트남전쟁 퇴역군인 등 2,400명이 집결했다. 기사에 대한 항의집회를 연 것이다. 미채색 옷으로 몸을 뒤덮은 前군인 등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사옥에 난입했다. 컴퓨터와 인쇄기를 잇따라 파손시키고 서류와 차에 불을 지르고 신문사를 마비 상태에 빠뜨렸다. "한겨레신문이 습격당한 날 어머니가 베트남에 있는 저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친정집 앞 벽이 전부 새빨갛게 칠해져 현관 앞까지 3개의 드럼통이 놓여졌다고. 그 안에 염산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베트남에 있었기에 직접 피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밤낮없이 협박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일본의 앞잡이!', '공산주의자', '매국노', '너는 여자가 아니었으면 크게 당했을거다'라는 위협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기사를 내기 전부터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한국 국내에서는 일본군의 종군위안부문제가 문제시되기 시작한 1990년대. 전후, 50여년이 지났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다지 많이 생존하지는 않은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학살은 1999년 당시 아직 약 30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현역 군간부도 있었고 퇴역 군인도 아직 50대였습니다. 기사를 내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려한 대로 강렬한 반발. 퇴역 군인들의 상식을 벗어난 행위로 인해 그녀의 "역사를 직시하기 바란다"라는 바람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 '한국군의 베트남 학살문제'는 금기가 되고 말았다. 실은 박근혜 대통령 자신도 '역사의 봉인'에 가담한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했을때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학살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죄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 발언에 대해 당시 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는 "김대통령의 역사인식에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이토록 손상시켜도 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며 격렬히 비판했다. 지난해 9월, 박근혜는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녀가 언급한 것은 경제문제뿐이었다.


구씨는 한숨을 내뱉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베트남에 대한 사죄의 말조차 사라졌습니다.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문제는 크게 후퇴했습니다. 지난 봄, 그녀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저는 빈호아(Bình Hòa)라는 곳에서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도앙 웅이아라는 남성에게 들은 이야기는 처절했습니다. 그는 생후 6개월에 학살사건을 경험했습니다. 한국군은 주민을 모아서 최루가스를 뿌리고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갓난 아기였던 그는 우연히 시체더미 아래에 있어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최루가스가 가득차고 장기간 시체더미 아래에 있어서 피와 빗물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실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앙씨를 취재했던 베트남 방송국 기자는 저에게 이렇게 따져들었습니다. "왜 당신네 나라는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가!" 올해는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지 50년이 되는 해다. 구씨의 최초 보도로부터 15년이 지났다. 세월이 지나고 많은 베트남 피해자도 나이가 들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이제껏 학살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사죄와 배상의 움직임은 없다. 한국사회도 한겨레신문사 습격사건 이후 불편한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언론은 스스로를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 '한번도 타국을 침략한 적이 없는 민족'이라며 자화자찬하고 있는 한편, 일본을 향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며 추궁한다. 구씨는 지금 조국에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한국은 아직 사회 성숙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사죄를 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이 있습니다. 미국에는 이를 받아들일 줄 아는 성숙한 사회가 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같은 일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의 퇴역 군인이 사죄를 하면 한국사회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을겁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려는 성숙한 사회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언동을 보더라도 현정권 아래에서 한국사회가 성숙해지는 일은 없을겁니다. 박대통령은 UN에서 '여성의 인권'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달리 해야 할 말이 있었을겁니다. 만약 박정희의 딸이 UN에서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행위에 관해 사죄한다면 어땠을까요.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기회를 그녀는 알면서 지나쳤습니다. 제 기사는 '조국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강한 반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은 사죄해야 한다', '감동했다'등의 격려의 메일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기사를 읽은 사람중에는 일본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는 이상 자신들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해야한다라는 의견도 퍼지고 있습니다. 베트남에 있는 위령비를 찾아간 참전군인도 있습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죄를 직시하는 것은 한국이 극단적 국수주의로 향하지 않기 위한 브레이크가 될 겁니다. 서로 과거를 직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국과 일본은 '보편적인 인권문제'로서, 역사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역사의 사실을 알리는 활동을 앞으로도 베트남에서 계속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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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리스토텔레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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