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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번역 [ニュース]

한국군의 베트남 대학살 (2) 베트남인이 증언한 한국군의 만행과 '라이따이한'

이 기사는 일본의 국제정보지 SAPIO 2014년 8월호에 실린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베트남인이 증언한 한국군의 만행과 '라이따이한'


한국군병사는 마을 여성을 윤간하고, 칼로 유방을 잘라냈다.


한국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민간인학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부녀자를 상대로 성폭행을 일삼았다. 능욕당한 뒤에 살해당한 사람, 한국군의 아이를 임신한 사람도 있었다. 베트남 땅에서는 희생된 여성들의 통곡이 묻혀 있다.


베트남 남부의 대도시 호치민에서 열차와 육로로 16시간, 국도 1호선을 타고 북상하면 남중국해와 접해있는 후이엔성 동호아현에 도착한다. 국도를 따라 논이 펼쳐져 있고 물소가 논밭을 일구고 있다. 이 한적한 시골마을 풍경이 지옥으로 변한 것은 1966년, 한국군의 주둔이 시작된 직후였다.


지역신문인 '후이엔 신문'의 황 딴 빈 편집장은 이렇게 말한다.


"1966부터 1968년에 걸쳐서 한국군은 후이엔성 해안의 거의 전역에 걸쳐서 주둔했습니다. 동호아현을 시작으로 후이엔성에는 한국군에 의한 학살현장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빈 편집장이 정리한 '한국군에 의한 학살 실태조사'보고서에는 한국군의 갖가지 만행이 수록되어있다.


"베트남의 구정월에 해당하는 1966년 2월 18일, 후이엔성 안에서 기지를 이동중인 한국군이 홍도아마을 습격했다. 한국군은 마을주민 30명을 한 곳에 모아 젊은 여성을 강간했다. 그 후, 마을주민은 총살당한 뒤 우물로 던져졌다."


"뚜이호아시의 호아동마을에서는 ‘시엔’이라는 소녀가 10명의 한국군에게 윤간당했다. 그녀는 살해된 뒤 칼로 토막이 났다."


본지(本紙)가 취재를 계속하자 성내의 곳곳에서 학살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동호아현의 호아히에쁘난마을에서는 1966년 1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군에 의한 살육이 벌어졌다. 당시 열 한 살이었던 구엔띠 만씨는 이렇게 말했다. "1월 2일 공격으로 37명의 주민이 살해당했습니다. 마을 남자들은 잡히면 무조건 죽은 목숨이었기에 거의 다 도망쳤습니다. 설마 남겨진 여자와 아이에게 손을 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죠. 하지만 한국군은 여자와 아이들을 정렬시킨 뒤 한 명씩 쏴 죽였습니다."


5월 14일에는 주민 47명이 희생되었고 부모, 형제, 친척이 모두 살해당해 고아가 된 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학살행위가 반복된 후이엔성 각지에서는 더욱 처참한 사건이 발생했다.


"저희는 2년에 걸쳐서 후이엔성에 있는 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학살사건의 청취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중에는 저희도 귀를 의심할만한 사례가 다수 있었습니다." (빈 편집장)


한국군은 학살한 뒤 춤을 췄다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1966년에서 1967년에 걸쳐서 뚜이호아와 뚜이안지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 한국군은 여성을 윤간하고 칼로 유방을 잘라냈다. 그 후, 여성의 성기에 칼을 쑤셔 넣어 살해했다.
  • 개구리 다리를 찢듯이 아이의 다리를 찢었다.
  • 아이를 내던져 병사가 가진 칼 위로 떨어뜨려 살해했다.
  • 5명의 병사가 한 명의 여성을 윤간하고 마지막에는 칼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

이렇듯 광기서린 한국군의 만행은 특히 베트남 중부 농촌지대에서 주로 발생했다. 후이엔성에서 차로 3시간 걸리는 빈딘성에서도 학살이 반복되었다. 빈딘성 타이선현의 따이빈 마을에 사는 휴엔 티 므이씨(60)는, 열두살 때 학살사건에 휘말렸다.


"1966년 1월 23일 오후 2시, 한국군이 마을에 찾아왔어요. 저는 재빨리 가까운 집으로 도망쳐서 살 수 있었지만, 주민 13명은 모두 권총으로 사살당했습니다. 다시 마을로 돌아 온 한국군은 탄환이 급소를 빗겨나 울부짖는 주민에게 총구를 겨냥한 뒤 사살했습니다. 그 후, 한국군은 30분도 넘게 신나게 춤을 추었습니다."



▲ 한국군 기지에서 하녀로 일하던 마이 딘씨는 한국군에게 윤간당하여 아이를 가졌다.



한국군기지가 있던 빈딘성에서는 학살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강간사건도 다발했다. 본지가 취재한 마이 딘씨(연령미상)는 17~18세 때, 한국군에게 윤간당하여 남자 아이를 임신했다.


"당시 저는 150명정도 주둔하는 한국군기지의 식당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갑자기 여러 명의 한국군이 덮쳐서 저를 식탁 위로 끌고 갔습니다. 무서워서 저항하거나 비명을 지르지도,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너 다섯 명의 남자가 강간하는 것을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상은 말하고 싶지도 않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요."


이렇게 한국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라이따이한'이라고 부른다. '라이'는 혼혈, '따이한'은 한국을 뜻하는 멸칭이다. 베트남에는 최대 3만명의 라이따이한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대부분은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으로 유입된 한국인과 현지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군의 강간으로 인해 태어난 라이따이한이 섞여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국군이 현지에서 매춘부를 임신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쟁난민인 소녀를 매춘굴로 팔아 넘긴 한국인 브로커

 

1969년에 지원병으로 베트남으로 건너간 한국인 남성이 익명을 조건으로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베트남 남부에는 미군과 한국군을 상대로 한 매춘가(街)가 있었습니다. 매춘부가 손님을 구하러 식당에 찾아오는 일도 있었죠. 병사들 대부분은 20대로 젊었고 가혹한 임무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마약을 손에 넣거나, 매춘부와 관계를 맺는 일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前남베트남정부군병사이자 라이따이한의 수양 부모인 장 듀이 리엠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제가 한국군과 자주 놀러간 곳은 맹호사단기지가 있던 빈딘성 꾸이뇽 시내에 있는 술집입니다. 그곳에서는 마음에 든 여성이 있으면 얼마 되지도 않는 팁을 주고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저에게 맡겨진 아이도 매춘부와 한국군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입니다."



▲ '라이따이한'인 듄씨



리엠씨에게 맡겨진 아이는 당시 한 살이었던 장 듀이 듄씨(46)다.


"어머니는 제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서 저를 쓰레기장에 버렸다고 합니다. 한국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매춘부라는 사실이 밝혀질 테니 어쩔 수 없었을 거에요. 친자식과 다름없이 저를 키워주신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지 2013년 12월호에서도 보도했지만 前아사히신문 사이공지국장인 이가와 카즈히사씨에 의하면 "한국군에게 파괴된 마을 여성들은 운 좋게 도망쳐도 전쟁난민이 되어 매춘을 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 여성을 이용하여 전쟁특수를 노리며 베트남으로 건너온 것이 한국인 브로커다.


"한국인 브로커는 전쟁난민 여성을 매춘산업에 이용했다. 닝호아의 백마부대기지에는 위안소도 있었고 군민일체로 관리매춘이 이루어졌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베트남 한국군 고위관리의 저녁 식사때는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예쁜 베트남 소녀가 바지런하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녀들을 어디서 데려왔는지 고위관리에게 묻자 대답을 얼버무리면서 ‘마음에 드는 애가 있으면 데려가도 좋다’며 웃더군요. 그녀들이 전쟁난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베트남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전승국이며 한국의 사죄도, 보상도 필요 없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14년 1Q(1/4분기) 대베트남 직접투자액에서 세계1위를 차지한 한국을 전략적 파트너로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인의 마음에는 무고한 사람들을 대량살육하고 부녀자를 유린한 한국군의 만행이 지금까지도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